누군가가 이룬 꿈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꿈의 씨앗이 된다. 열정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시간의 탑은 쉽게 허물어지지도 틈을 보이지도 않는다. 이는 첼리스트이자 생명과학자로서 예술적 상상력과 과학적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는 고봉인(34)이 짓고 있는 견고한 탑이다. 의과학자인 아버지(기초과학연구원 혈관연구단장 고규영)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백승희)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과 과학을 접하게 된 그는 스스로 선택한 길에 ‘자유롭게’ 그러나 ‘엄격하고 철저하게’ 질문을 던지며 성장해왔다.
그가 먼저 펼친 세계는 음악. 1997년 10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생으로 들어가 차이콥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 첼로 부문 1위에 올랐고, 14살에는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음대에서 공부했다. 2005년에는 독일 첼로 마스터클라스 란드그라프 폰 헷센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하버드대 생물학과를, 이듬해에는 뉴잉글랜드 음악원 첼로 석사를 졸업했다. 늘 음악과 과학의 자장 안에 머물고 있는 그는 2014년 프린스턴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KAIST 전문연구원으로서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다. 일상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무대와 실험실을 오가고 있는 그를 공연 리허설 전에 만나보았다. 퇴근 후 대전에서 SRT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뷰 장소로 찾아온 그는 어깨에 첼로를 메고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의 첫 장을 열면서 음악과 과학에는 어떤 친화력이 작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술적인 마인드는 과학을 보는 눈을 변화시켰어요. 현재 우리 몸의 혈관을 연구하고 있는데, 각기 다른 혈관의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여러 가지 색으로 세포들을 염색하고 현미경으로 찍어야 해요. 실제로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현미경도 잘 찍더라고요. 찍는 방법도 수천 가지인데, 딱 봐도 이런 이야기구나 하는 작품이어야 하죠. 음악을 해서인지 그런 면에서 더 까다로워요. 결론적으로 생물학은 이미지로 설득하고, 음악은 악보를 창의적으로 해석해 연주함으로써 청중을 설득하는 거죠.”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첼로를 연주하던 그가 호기심 많은 소년처럼 자신의 연구 분야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 순간 바닥에 가지런히 눕혀져있던 첼로가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가 처음 첼로를 만난 순간은 어땠을까.
“누나가 먼저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는데, 저도 관심이 생겼어요. 사실 현악기가 어렵다는 인식도 있었고, 누나가 매일 연습하는 모습에 두려움도 느꼈죠. 피아노를 전공하신 어머니는 음악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러다가 끝내 부모님을 설득해서 8살 때부터 시작했는데, 바이올린이 아닌 첼로를 선택했죠. 우연히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베토벤 소나타 CD를 듣고 첼로의 매력에 푹 빠졌거든요. 거창하게 음악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첼로를 꼭 하고 싶었어요(웃음).”
그는 다시 음악가로 돌아와 자신만의 음악 체험과 첼로의 매력에 대해 하나씩 풀어나갔다. 한 음 한 음 ‘말하듯이’ 연주한 카잘스의 첼로 선율은 마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처럼 인식됐고, 그 묵직한 음성은 소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무대 위에서 첼로를 다리 사이에 놓고 심장이 닿는 면을 감싸 안으며 가장 사적이고도 공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였지만, 정작 자신은 천재가 아닌 노력파라며 손사래를 쳤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머리가 월등히 좋지도 않았고, 경시대회 경력도 없었어요. 심지어 말도 늦게 배워서 부모님이 병원에 데려가실 정도였죠.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익히기 전까지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어요. 이런 성격은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그래서 남보다 빠르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무조건 노력해요. 안되면 계속 하는 끈기와 지구력은 내세울 만하죠(웃음). 하버드에서도 천재들 사이에 있으니 신경이 많이 쓰이더라고요. 같은 조건이지만 시간이 배로 필요하니 정말 힘들었죠. 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이 일과표에 따라 하루를 여닫는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는 실험실에서 일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 식사는 부모님과 함께한다. 8시부터 10시까지는 악기 연습에 집중하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 미리 세팅해 놓은 것들을 마무리한 뒤 나머지 실험에 몰두한다. 그렇게 새벽 3시까지 실험실에 불을 밝히고 귀가하면 비로소 하루가 끝난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궤도에서 그는 어떻게 삶의 구심력을 지키고 있을까.
“과거 한예종 예비학교 심사위원이셨던 정명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음악은 마라톤이기 때문에 끝까지 잘해야지 지금 잘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저 역시 음악이든 과학이든 끝까지 하려면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크게 궤도이탈은 하진 않죠(웃음). 실험실에서 더 고민하거나 밖으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요. 한국에 들어온 지 3년 됐는데, 친구들이 대부분 외국에 있어서 외로울 때도 있어요. 정말 힘들거나 억울하면 윤이상 선생님의 통영으로 가요. 그곳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힐링이 되거든요.”
2008년 남한 연주자 최초로 북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그는 그날의 감동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한다. 윤이상 선생의 못다 이룬 꿈을, 평생의 한을 풀어드렸다는 기쁨과 함께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느꼈기 때문이란다.
“부끄럽지만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윤이상 선생님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그분의 음악을 접하고 나서 ‘음악이란, 음악의 위대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아버지도 동행하셨는데, 공연 후 평양 공항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운해 하는 제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셨어요. 꿈은 이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아쉽더라고요. 선생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어요. 독보적인 음악으로 독일 사회에서 인정받았고, 지금도 독일인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하죠. 자신의 억울함에 굴복하지 않고 음악의 영역을 바꾸며 끝까지 노력하신 멋진 분이에요. 저도 가슴에 고국 ‘한국’과 고향 ‘전주’를 음악적 뿌리로 삼으며 연주하고 있어요.”
그는 잠시 그날의 소회를 밝히며 차 한 모금으로 잠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새로운 시간대에 올려놓았다.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는 이로운 음악과 과학, 이 두 세계가 대위법의 선율처럼 공존하는 인생의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선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와 실험실에서 놀았던 기억은 저에게 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어요. 아버지는 직접 보드에 만화를 그려서 당시 진행 중이었던 연구에 대해 설명해 주셨죠. 정말 일을 사랑하셨고, 인간적으로도 따뜻하신 분이에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과학을 놓지 않고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죠. 아버지처럼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인간적인 과학자, 그리고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아름다운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요. 지금까지는 트레이닝 단계였다면, 앞으로는 두 분야를 적절히 잘 접목해서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삶을 연주하고 싶다는 그의 활시위는 늘 타인을 향해 있었다. 자유의지로 밀고 당기는 내면의 기조력은 무대와 실험실, 그리고 일상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꿈꾼다. 그 깊은 울림으로 퍼져나갈 미래가, 개척해나갈 길이 기대된다.

글. 사진/ 김신영 기자    
@오더 에스프레소(ORDER ESPRES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