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에는 희극적이되 내면은 비극적인 것, 그보다 더 모욕적인 괴로움은 없으며, 그보다 더 깊은 노여움도 없다. … 그의 언사가 지향하는 쪽이 있건만, 그의 얼굴은 엉뚱한 쪽으로 향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 L’ Homme Qui Rit>(1869)의 한 구절이다. 희대의 악당 캐릭터 ‘조커’(Joker)의 원형으로 잘 알려진 주인공 ‘그윈플렌’(Gwynplain)은 귀밑까지 찢긴 입으로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17세기 영국의 부패한 왕정과 귀족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은 시대를 넘어 다양하게 변주되었고, 그중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거장 파울 레니의 동명의 무성영화는 고전 명작으로 꼽힌다.

원작의 뚜렷한 주제의식과 문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또 다른 변주로는 한국 창작 뮤지컬 <웃는 남자>도 있다. 175억 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이 작품은 지난 1월에 재연되었고, 화려한 무대 메커니즘과 시청각을 사로잡는 극적 요소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 그윈플렌을 맡은 배우들의 열연은 괄목할 만하다. 특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입체적인 인물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규현(33)의 연기적 성장도. ‘그윈플렌’의 뜻처럼 무대라는 ‘하얀 평원’을 달리고 있는 그를 서울 모처의 카페에서 만나보았다. 소집 해제 후 뮤지컬 복귀작으로 선택한 <웃는 남자>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었어요. 감을 잃었을까 걱정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저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만족하시고 제 인생작이라고 해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순간순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야죠. 작년 초연 때 공연을 인상적으로 봤는데, 사실 처음에는 잘 몰랐고 두 번째 볼 때 그윈플렌의 마음이 이해됐어요.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를 다 차버리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그 심정이.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거든요(웃음). 그래서 그윈플렌이 더 대단한 것 같아요.”

독자적인 연기 노선으로 그윈플렌에 색을 입히고 결을 다듬고 있는 그는 특유의 맑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캐릭터에 힘을 실었다. 인물의 외형적 특성과 내면과의 간극을 극대화하는 분장을 하고 자유로운 몸짓언어를 구사하며 들려주는 유희적 비판은 극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는 이처럼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하면서 자신감이 생겨났고, 연기적으로도 성장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분장이라는 가면은 무대 위 강력한 도구였을 것이다.

 “분장을 직접 해보시면 아실 텐데, 되게 자신감이 넘쳐져요(웃음). 그것이 없으면 연기할 때도 어색한 감이 있는데, 분장하면 당당하게 몰입할 수 있거든요. 마치 찢긴 입을 갖고 태어난 사람처럼, 원래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인 듯이 착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분장은 저에게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제를 견인하며 펼쳐지는 주인공의 여정은 서정성 짙은 넘버와 가창력을 돋보이게 하는 강렬한 넘버를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중 <그 눈을 떠>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이다. 이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강행하는 상원 의원들에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며 호소하는 곡으로, 그윈플렌이 현실에 눈을 뜨고 의식의 전환을 맞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처음부터 염두에 둔 건 아닌데, 런 스루를 할 때 연출가님이 제가 밝은 느낌이라고 모니터링을 해주셨어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더 커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전반부에는 더 해맑고 천진난만한 그윈플렌을 만들려고 했죠. 조시아나 여공작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순박한 청년을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어요. 여공작이 유혹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더 많이 당황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죠. 신영숙 누나에게 얘기하지 않고 애드리브로 재미있는 걸 많이 했는데, 잘 맞춰주시고 좋아해 주셨어요(웃음).”

그룹 슈퍼주니어(2006)로 데뷔한 뒤 뮤지컬 <삼총사>(2010)를 시작으로 <모차르트!><베르테르> 등에서 다양한 연기 변신을 해온 그는 11년 차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그룹 활동과 예능 출연 등 바쁜 일정 속에서도 뮤지컬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대가 너무 즐거워서이다. 자신의 강점인 노래를 들려줄 수 있고, 이를 좋아해 주는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에.

“뮤지컬을 시작할 당시에는 팬들 외에는 저를 몰랐어요. 연습하러 갈 때 지하철을 타도 아무도 못 알아봤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지만 흘러가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다른 누군가가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지금은 더 솔직해지고 진심을 담아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죠. <베르테르> 할 때 엄기준, 조승우 선배님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극에 금방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그때를 가장 싫어해요. 늘 우울해 있어야 하니까(웃음).”

이번 무대에서는 연기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노래라는 텍스트에서 전달해야 할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고차원적인 목표보다 그저 아쉬움 없이, 지금과 같이 실수하지 않고 공연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수로서든 뮤지컬 배우로서든 또 예능인으로서든 늘 유쾌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서고 싶다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려고요. 이렇게 일할 시간이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요. <신서유기>처럼 예능에서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불안감이 없어요(웃음). 퇴근길에 팬들께서 주신 편지를 다 받고 읽는데, 그분들에게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멋진 가수,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요. 슈퍼주니어 활동도 힘닿는 한, 어디 몸이 부러지지 않는 이상 해야죠. 팬들이 없다면 못할 텐데 계속 계셔주시니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유쾌할 때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할 때는 누구보다 진중한 태도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그는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순간 다음 공연이 기다려진단다. 무대 위에 꼭 서야 할 사람, 점점 더 무르익어가고 있는 청춘은 널따란 평원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글 김신영 편집장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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