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_ 음악으로 만나는 세상 _ 조가람

만남

음악으로 만나는 세상

조가람, 피아니스트

나는 아빠의 오디오와 엄마의 책으로 빚어졌다. 어릴 적 온 집을 가득 메웠던 각양 각종의 스피커와 진공관, LP 플레이어와 앰프들, 집은 아빠의 소리 실험실이었다. 취미로 오디오와 스피커를 만드셨던 아빠는 ‘이 앰프와 이 스피커로 이 음악을 들어봐, 그리고 이 스피커로는 이 음악을 들어봐’ 하며 소리의 배합을 들려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이 소리 실험실이 내가 받은 음악 교육의 9할, 아니 어쩌면 전부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고요함을 좋아하셨다. 조용한 가운데 베토벤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내려 마시는 커피, 함께 읽으신 책, 그것이 엄마의 삶이었다. 향과 글로 채우는 엄마의 시간에 나도 함께 책을 읽었고, 아빠와 함께할 때면 소리로 나를 채웠다. 책장을 넘길 때의 소리와 손에 책이 닿는 까끌까끌한 촉감이 참 좋았다. 흑백의 글자 뒤로 생생히 펼쳐지던 이야기와 상상으로 그려 낸 책 속의 세상을 나만의 세상처럼 유영했다. 피아니스트가 정말 되려고 했는지, 서너 살 무렵에는 읽는 족족 책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마치 악보의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기호까지 암기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동네에 있던 마을문고의 책을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5천 권까지 읽어 강동구에서 다독상도 받았다.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시력과 키를 잃었지만, 나는 동네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아는 아이였다.

악보는 소리로 만든 이야기였다. 한 권의 악보에 새겨진 음악은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가로 자랐다. 이성적 통제 없이 감정과 직감대로 돌진하는 야생마처럼 악보를 제멋대로 해석하던 중, 고등학생 시절, 그래서인지 나는 좀처럼 1등은 하지 못하는, 만년 2등 학생이었다. 철학과 종교, 존재를 깊이 탐닉하며 음악을 멀리했던 대학 시절을 지나 갑작스러운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에 맞닥뜨렸던 20대 중반이 왔다. 음악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하며 피아노까지 팔아버렸던 그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큰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가 자주 찾아왔고, 일이 끝나고 새벽에 틈틈이 연습하며 선 무대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2천여 명이 모인 커다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무대에서 희고 까만 건반을 내려다보며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카덴차의 마지막 음을 누른 순간, 자그마한 내 삶에 주어진 소명을 찾은 듯했다. 신께서 직접 네 인생을 선택해 보라고, 소중함을 느껴보라고 주신 것 같은 몇 년간의 경제적 시련, 그것은 참으로 음악을 열망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심연의 자아를 마주하고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꼭 잃었던 연인을 마주하듯 피아노와 재회한 나는 빈곤하든 부유하든, 무명하든 유명하든, 음악과 함께 하겠노라 다짐했다.

유럽으로 떠났다. 남들보다 매우 늦고 아무런 연줄 없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국제대회 출범이었지만 꽤 자주 계란이 바위를 깼다. 베를린에서 보낸 8년간 나는 무수히 많은 곡을 만났다. 음악을 우걱우걱 삼키며 만남에 굶주렸던 배를 채웠다. 한번 연주할 프로그램이 정해지면 그 곡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가족이나 연인보다 가까운 존재가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이 들 때까지 온 세포가 그 곡을 향해 있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동기나 끌림이 분명한 곡을 연주하려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몰입과 완연한 합치를 이룰 수 있고, 그 시간의 조각들이 음악가의 인생을 완성해간다. 이 합치를 위한 인고의 시간 동안 음악에서 인생을 배운다. 음악을 내 인생으로 데려와 숨을 불어넣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음악에서 나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외로움이 피워내는 선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누리며 위로를 얻었고, 예술로 총검을 잡고 폴란드의 얼을 끝내 지켜 낸 쇼팽의 음악에서 유약한 신체 속에도 품을 수 있는 숭고한 대의를 고찰했다. 스탈린의 개로 불리며 독일전의 승리를 찬양하는 곡으로 알려졌던 프로코피예프의 전쟁 소나타에서, 그 기저에 흐르는 알려진 바와 반대의 작곡가의 의중을 읽었다. 한쪽에서 포화가 떨어져도 새벽 동은 트고, 가족은 정을 나누고, 울고 웃으며 삶은 계속되는 그로테스크한 전쟁 속 삶의 사르카즘, 이를 그려 낸 만화경을 보았다.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할 때, 달빛 아래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페르소나를 벗은 참 자아의 모습을 느끼며 묘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렇게 한 곡의 음악을 만날 때마다 나는 세상에 첩첩이 싸인 이야기를 읽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곡가를 만나고,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현 상태와 현 자아를 만난다. 이런 거듭되는 깊은 만남은 나를 야생마에서 “Tempo dell’anima”, 즉 영혼과 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속도의 상태로 이끈다. 일흔쯤 되면 음악 안에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 마음속에서 원하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 참 자유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해도 나는 그저 진정을 다해 이야기꾼으로서 한 음악이 담고 있는 세상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음악(音樂)은 음학(音學)이 아니어서, 정답도, 정격도, 진리도 아닌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이더라. 나는 이 이야기보따리를 한 짐 짊어지고 오늘도 무대로 나가 관객에게 말은 건다. 오늘 만난 당신, 내가 가져온 이야기는 이러하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서울대학교 피아노 학사. 독일 한스아이슬러음악대학교 대학원 피아노 석사 및 박사. Delia Steinberg 국제 피아노 콩쿠르 입상(2013), Berliner Renate Schorler Stiftung 국제 콩쿠르 준우승(2014), Hastings 국제 피아노 콘체르토 콩쿠르 준우승(2015), Windsor 국제 피아노 콩쿠르 입상(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