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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교양/종합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3년 08월
제목  "그녀와 만들어가는 관계의 미학" - 만남 / 노덕, 영화감독






유치원 친구를 지금도 만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유치원 때 친구와 연락이 되다니. 순간 날 상당히 성실한 시선으로 보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희전은 유치원 시절 내 유일한 단짝 친구였다. 희전 외에는 연락이 되는 그때 시절의 친구도, 기억나는 이도 없다. 이는 희전에게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앨범을 보면 우린 항상 함께 있다. 소풍을 가서도, 서로의 집에 가서도, 유치원에서 분장을 하고 있을 때조차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심지어는, 가족들끼리도 친해 서로의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일 뿐이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서로 다른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린 서로의 존재를 무섭게 잊어갔다.
학교에선 또 다른 친구를 만들어나갔고, 5학년 때 우리집은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사업이 서서히 기울면서 이사를 자주 다니던 시기였다. 남들처럼 나도 사춘기를 겪었다. 공부보다는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며 혼자 감수성에 젖어 살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올라간 첫날. 그곳에서 희전을 다시 만났다. 같은 반 앞쪽에 앉아있던 아이가 오더니 대뜸 “너 덕이냐?” 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노덕’이라는 이름이 귀에 걸렸다고 했다. 세상에 ‘노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는 나 밖에 없을 거라며 유치원을 같이 다녔던 그 희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선생님이 ‘김희전’이라는 출석을 불렀을 때 혹시 그 희전? 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 신기한 인연에 우리는 함께 들떴다. 서로를 보며 웃었고 어떤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희전은 많이 변해있었다. 사실, 난 희전이 자신을 밝힌 이후에도 어렸을 때 기억에 남아있던 그 아이가 정말 맞는지 의심도 했었다. 뽀얗고 흰 피부를 갖고 있던 공주 같던 그 꼬마아이는 여드름을 가진 털털하고 시크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성격도 꽤 변해 사실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희전도 마찬가지였다. 유치원 때 단짝이라고 해서 고등학교에 와서도 단짝이 되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곧바로 현실을 인정했다. 둘 다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와 아무도 모르는 한 반에서 만났으니 쉽게 어울릴 수 있었지만, 서로에게 더욱 맞는 친구를 찾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상하게도 이런 애매하고 까다로운 결정이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느낌으로 가능했다.
이후로 희전과의 관계는 묘하게 이어졌다. 각자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희한하게 희전과 통했다. 가령 음악을 듣는 취향이라던가, 영화, 그리고 만화를 좋아하는 취미까지도 희전과 같았다. 이 신기한 경험에 결국 어렸을 때 함께 지냈던 것이 본능적으로 같은 취향을 갖고 있는 이와 끌렸던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할 무렵, 난 막연하게 영화를 하고 싶었고 별다른 갈등 없이 영화과에 들어갔다. 희전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쉽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희전은 성적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사실상 선택의 폭이 넓었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더욱 치열하게 판단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전은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기를 다니고 자퇴한 뒤, 영화를 전공하기 위해 시험을 다시 쳤고 합격을 했다. 유치원 때 단짝친구와 함께 영화를 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영화는 사실 외로운 작업이라 동료가 존재하기 힘들다. 주변에 스탭이 아무리 많아도 연출자로서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고, 그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희전과는 학교도 다르고 커리큘럼도 달랐지만 함께 영화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열어놓고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희전은 재능이 뛰어났고 항상 난 희전에게 자극을 받았다. 유치원시절의 둘도 없는 단짝친구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 두 시절이 언제든 서로의 의견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게 했던 우리의 이상적인 영화적 동료 관계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나의 첫 장편영화 VIP시사회에 희전을 초대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하지만 희전은 거절했다. 개봉하면 직접 돈을 주고 극장에 가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난 희전의 대답에 고마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역시나 희전은 얼마 후 극장에서 보고 소감을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나라 영화계에 희전과 같은 친구를 둔 영화감독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생각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배정을 하신 분에게 지금이라도 감사인사를 드린다.



*1980년 생. 서울예대 영화연출 전공.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 스크립터,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2005) 감독․각본, <연애의 온도>(2013) 각본․연출. <연애의 온도>, 상하이 국제영화제 Asian New Talent 최우수 작품상 수상.


사진. 홍덕선
copyrightⓒ월간에세이





           [출처] 월간에세이 (2013-08)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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