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의 단단한 태도가 주는 어떤 위안에 대하여

16살의 수남(이정현)은 집 근처 공장에 가서 “여공”이 될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엘리트”가 될지 기로에 놓인다. 수남은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하는데, 이때 그녀가 꿈꾸는 “엘리트”의 삶이란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화이트칼라의 그것이다. 타고난 손재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자격증을 14개나 따고, 담임선생으로부터 ‘진짜 무기인 몸매’를 잘 활용하라는 삿된 조언까지 들을 정도로 “가슴도 꿈도 컸”던 수남의 포부는 사회에 첫발을 디디자마자 처참히 무너진다. 사회에는 수남보다 가슴이 큰 여자가 많으며, 컴퓨터라는 시대의 흐름 앞에 수남의 자격증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영화는 초반부터 수남 캐릭터의 지위를 명료하게 육체노동자로 한정함으로써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성실의 연대기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판을 깐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남이 성실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고, 성실할수록 가난해지고 성실할수록 잔인해지는 역설의 구렁텅이에 빠진 수남을 통해 ‘성실’이라는 가치의 이면에 숨겨진 비릿한 진실을 파헤친다.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후 점점 피폐해지는 남편의 삶의 의지를 되찾아주기 위해 ‘내 집 마련 프로젝트’에 돌입한 수남은 “일을 더 늘려야 해. 조금만 더 하면 돼. 나만 열심히 하면 돼. 나만 하면 돼”라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끝없이 채찍질한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나만 하면 돼’ 같은 말들은 수남의 신산한 삶을 버티게 하는 성실의 정언명령이다. 하지만 수남이 꾸준히 일한 만큼 집값도 꾸준히 오르고, 결국 그녀는 집을 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본의 힘을 빌린다. 수남의 9년 동안의 노력이 은행 빚으로 단박에 무색해지는 순간, ‘성실’이라는 단어는 기표와 기의가 분리되어 허공에 흩뿌려진다. 노동자가 갖춰야 할 자질로 칭송받아온 성실, 노력, 근면 같은 덕목들이 더이상 전통적인 함의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착하다’ 같은 인격적 관념이 효율과 기능을 강조하는 도구적 수사로 손쉽게 환원되는(예를 들어 ‘착한 가격’, ‘착한 품질’) 사회에서 ‘성실하다’는 관념이 그 본연의 뜻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자신이 살던 세상과 ‘다른’ 모습을 갖춘 원더랜드를 노닐며 자아를 형성하는 모험가라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은 천민자본주의라는 악다구니판에서 왜곡된 성실처럼 ‘틀린’ 개념을 바로잡는 임무를 부여받은 해결사다. 돈이 지상가치인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실’이라는 개념에 거창하고도 뒤틀린 의미부여가 이뤄지는 이유는, 그래야만 자본가의 수익을 위해 충실한 부속품으로 복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성실한 개인’으로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성실한 노동이라는 입력을 했음에도 합당한 보상이라는 출력을 받지 못한 수남-부속품만이 유일하게 생산수단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망가진 인과율을 헤집어볼 자격을 부여받는다.

각종 관념들이 가치중립성을 잃고 지배계급의 이권을 지키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누적 설계된 부조리한 사회에선 모든 실패와 불행이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전가되고 만다. 이처럼 구조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무용해지는 상황을 돌파하는 수남의 행동은 절망의 메타포를 활용하여 거꾸로 희망을 진단하려는 영화의 야심과 궤를 같이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뼈 빠지게 고생하고도 집을 사기 위해 은행 빚을 져야만 하는 수남의 상황을 통해 구조적 모순 앞에서 성실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이미 방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수남으로 하여금 자살시도에 실패하여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다시금 성실의 연대기를 이어가도록 몰아붙인다. 남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한 파편화된 노동 숏들(지극히 피로하게 느껴지는)은 수남이 집을 사기 위해 9년간 벌였던 노동 시퀀스와는 결이 다르다. 살아 있는 남편과의 행복을 위한 수단적 성실함에서 식물인간 남편의 연명을 위한 관습적 성실함으로의 변이. 목적과 영혼을 상실한 채 내재화된 성실함에 질질 끌려다니는 주체성 없는 수남의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재개발이라는 새로운 욕망으로의 길을 터준다. 수남이 배달신문과 밀대걸레를 놓고 재개발 설문지를 손에 쥐면서부터 성실한 나라엔 미세한 균열이 발생한다.

수남이 행복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는 이 균열의 원인은,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혼재된 두 가지 징후에서 비롯된다. 바로 캐릭터 수남의 착각과 배우 이정현의 얼굴이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앳된 이정현의 얼굴에 육체노동자의 극단적인 피로감이 새겨지는 순간을 카메라가 포착하면 언캐니(uncanny)한 정서가 발생하는데, 이 정서는 공고히 다져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파쇄하는 균열의 첫 번째 징후다. 성실의 연대기가 주는 무게감에 짓눌려 황폐해진 수남의 얼굴은 배우 이정현의 아우라를 빌려 그 자체로 하나의 스산한 풍경이 된다. ‘Chapter3 신혼여행’의 첫 번째 숏은 달동네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에서 시작하여, 그 집들을 배경으로 기이한 표정 변화를 보이는 수남의 얼굴로 끝난다. 전경(前景)이었던 집들은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후경(後景)이 되고, 수남의 얼굴이 전경으로 대체된다. 지배계급의 시혜적 기만인 재개발 지대를 배경으로, 고통부터 열락까지 극단적인 표정 변화를 보이는 수남의 얼굴은 모순투성이 구조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서민들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균열의 두 번째 징후, 수남의 착각. 남편의 병원비가 없어 절박한 수남에게 재개발은 일확천금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지만, 이런 식의 요행은 성실과 가장 동떨어진 개념이다. 그런데 팽팽하게 짜인 영화의 플롯 때문에 수남은 재개발 혜택을 받을 기회가 마치 자신의 성실한 노동에 대한 대가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보상심리에 눈이 먼 수남은 재개발 설문지 돌리기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모두 죽이는데, 수남이 방해세력을 죽이는 방식이 그동안 그녀가 익힌 노동의 기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성실의 유산인 수남의 전문노동기술은 보상의 기제 앞에서 전문살인기술로 탈바꿈한다. 부조리한 구조의 희생양에서 그 구조에 흠집을 내는 해결사로의 극적인 역할 전환. 지배계급의 우회적 기만술이 극에 달하면, 그들에게 강요받아온 메커니즘을 그대로 적용하여 내홍을 일으킬 수 있음을 수남은 온몸으로 증명한다. 물론 수남의 착각은 구조를 뒤엎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하지만, 사고의 틀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수남의 살인이 같은 계급 내에서만 벌어지고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등 명확한 한계도 보이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애써 그 한계를 숨기려 들지 않는다. 영화는 쉬이 바뀌지 않을 우울하고 참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한 채 수남의 일탈이라는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데 만족한다. 그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아무튼, 앨리스는 더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숏. 식물인간 남편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수남의 뒷모습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존엄사에서 존엄만 기억하라”는 의사의 말장난 같은 흐리터분한 세상을 박차고 의연히 떠나는 수남의 뒷모습에선 ‘존엄’처럼 호도되고 강요된 개념 대신 스스로 ‘사’(死)를 택함으로써 진짜 존엄을 얻는, 서글프지만 단단한 태도가 주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